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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노동소식

김진숙, 309일 전 “높은데 오니 전망이 좋다” 그녀 웃음만은 여전


등록 : 20111110 15:30 | 수정 : 20111110 18:32


 

잠정합의안 가결돼 85호 크레인 내려온 김진숙 지도위원|
“내 발로 내려가겠다”는 바람 이뤄져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던 309일
‘희망버스’는 시민들의 빚갚음
트위터는 그녀의 강력한 소통무기
 

» 꽃다발을 받고 기뻐하는 김진숙 지도위원. 박종식 기자
 “높은데 오니 전망이 좋다. 나중에 크레인 한대를 사야겠다.”

 부산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이윤경(40)씨는 올 1월6일 ‘절친’ 김진숙(51)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에게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받고 가슴이 덜컹했다.

 한진중공업 영도사업소 제85 크레인이 어떤 곳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2003년 김주익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129일간 고공농성을 하다 “노동자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에 절망하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35m의 고공 크레인이었다. 그곳에 김 지도위원이 아무도 모르게 올라간 것이다.

김주익 위원장의 자살 열흘 뒤엔 한진중 곽재규씨가 10m 아래 도크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김 지도위원은 크레인에 오르기 전 “이렇게 조합원들 잘려나가는 것을 눈뜨고 볼 수만은 없는 것 아닙니까”라며 정리해고된 한진중 노동자들이 복직될 때까지 스스로 내려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담은 편지를 조합원 앞으로 보냈다.

 “그가 죽었을 때 죄책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2주일 내내 울었습니다. 그런데 곽재규 조합원이 뒤따라 죽었습니다. 두 사람 합동장례 치르고 집에 돌아와 무심코 보일러를 켜려다가 흠칫했어요. 동지를 두 사람이나 묻고 와선 그래도 뜨스운 방에서 자겠다고 보일러를 켜는 자신이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 토해가며 운 뒤로는 한번도 보일러를 켜고 자지 못했습니다. 현재 상황이 그때랑 똑같습니다. 사쪽이 자꾸 저를, 노조원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습니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2011년 6월20일치 인터뷰중)

누울 자리는 커녕 양동이에 용변을 해결해야 하는 1평도 안되는 비좁은 크레인 안에서 4계절이 지나도록 “내발로 내려가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던 김 지도위원의 바람이 10일 이뤄졌다. 김씨는 이날 정리 해고자 94명을 1년안에 재고용한다는 것을 뼈대로 하는 노사의 잠정 합의안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무투표로 가결되자 오후 3시 20분께 그동안 농성을 벌인 영도조선소 3도크 옆 높이 35m의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9일 오후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밝게 미소 지으며 해고노동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부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김 위원이 살아돌아온 것을 마냥 기뻐만 하기에는 그가 크레인에서 견뎌야 했던 세월이 너무 모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의 존재가 없었다면 한진중 사태가 이렇듯 극적인 타결을 이루기는 힘들었던 것은 분명하다.

 스스로 한진중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던 한국사회 전체가 목숨을 담보로 한 그의 투쟁에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30년 가까이 노동운동을 하면서 “자신은 라면을 먹어도 동지들에게는 밥을 사주는 사람”(이윤경씨 <주간경향> 인터뷰중)으로 기억되던 그의 넓은 오지랖은 노동운동과 무관하게 살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지난 6월12일 85호 크레인을 향해 첫 발차한 ‘희망버스’는 따지고보면 “김진숙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많은 시민들의 빚갚음이었다. 출발 전날 회사쪽의 강력한 방해작전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넘어 750명의 시민들이 희망버스에 올라탔다. 그것은 노동운동과 시민이 연대하는 새로운 방식의 운동을 낳기도 했다.

 김진숙씨도 “희망버스는 제가 30년 가까이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겪어보지 못했던 아주 새롭고 신비로운 운동”(한겨레가 만난사람 인터뷰 중)이라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표시했다. “희망운동, 아무 조직적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 돈내서, 1박2일의 시간을 내서 낯선 곳, 낯선 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선합니까!”

 트위터는 동참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확산시키는 또다른 희망버스였다. 배우 김여진씨가 체포된 뒤 경찰버스에 올린 트위터 내용은 수많은 멘션과 함께 김진숙과 희망버스, 한진중 노동자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김진숙에게도 트위터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의 절친 김주익은 절망하며 죽어갔지만 김진숙씨 트위터를 통해 35m 아래 세상과 소통을 주고받았다. 회사쪽은 한때 휴대전화 배터리 공급마저 중단시켜 세상과의 단절을 시도했지만 그는 태양광 배터리를 이용해 사람들의 메시지 수신을 이어갔다. 그러는 사이 희망버스는 5차까지 수많은 시민들의 동승행렬이 이어졌다.

 <뉴욕타임스> <비비시> 등 수많은 언론들이 앞다투어 김진숙의 고공투쟁을 보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G20 의장국이라는 국격을 자랑하던 한국에서 51살의 여성노동운동가의 고공투쟁이 한국 시민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파장에 주목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크레인 투쟁과 희망버스라는 연대, 그리고 트위터 소통이 신자유주의 광풍이 할퀴고 지나간 세계인의 심장을 울린 것이다.

 김도형 선임기자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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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85호 크레인 내려온 한진중 김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