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활동소식

우리는 지금 5.18 속에 살고 있다.


5월을 장미꽃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이 아닌
핏빛 투쟁의 계절로 떠올리게 된 것도 퍽 오랜 일입니다.

광주.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저질러진 가장 잔인한 학살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5.18 기념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금지하고
방아타령을 부르겠다던 어처구니 없는 정권의 쪼잔함에 혀를 찼더니만
올해는 세상에나...
5.18 학살이 북의 특수부대 소행이라는 정말 기가 차서 웃음도 안나올 이야기들이 들립니다.

그랬군요.
31년전, 우리 특전사는 총과 군복과 군트럭 등등을 북한군에게 빼앗기고,
북의 특수부대 600여명이 저 남도 빛고을까지 행진하는 것도 몰랐나 봅니다.
그리고 그 북의 특수부대는 참으로 교활하게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기 전
애국가까지 틀었더랬군요...

참나... 그들의 무한한 상상력은 대체 어디까지인지 궁금합니다.
당시 그 자리에서 학살을 목격한 수 많은 분들이 아직도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는데
어떻게 그런 망발을 서슴지 않을 수 있는지
그 용기가 가상할 뿐입니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역사왜곡을 자행하는 자들이 설치는 와중에
올해도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광주의 역사를 모욕하는 자들때문에
올해는 더욱 광주가 서글퍼 보였습니다...


바로 이분들.
이 분들이 당시 광주항쟁에서 총을 들고 싸우던 시민군들입니다.
앞에 서 계신 분은 당시 27세 청년으로 형님과 함께 상무대에 잡혀와 모진 고문을 당하셨다고 했습니다.

5.18의 역사가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곳 상무대에서 저질러진 인권탄압은 당시 아예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았거니와
폭력과 고문 속에 변호사도 없이 군법회의에 의해 처벌받은
살아 남은 이들이 차라리 죽기를 소망했던 곳이 바로 이 상무대입니다.


그해 5월, 광주를 질주하던 군용트력은 군인을 싣지 않았습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보이는대로 잡아들인 광주시민들을 싣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그들의 부대를 하얀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보복을 두려워해서라는군요.

 


이렇게 도청 함락 후 곳곳에서 잡혀온 시민들은 헌병대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유치장에 끌력가던 당시 상황을 재연해 보는 참가자들.
우리는 어색함에 웃고 있지만, 당시 시민들은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 선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이 분은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셨습니다.
도청에 들어갔다가 고등학생은 나가라고 해서 나오셨다는 이 분은
28일,연행되어 이곳 상무대에서 악몽같은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당시 시민들이 갇혀 있던 곳입니다.
약 30여명이 들어서도 꽉 차는 이 곳에 백여명이 넘게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안내해 주신 분이 목격한 김영철 열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들불야학을 하며 마지막까지 항쟁지도부로 활동하셨던 김영철 열사는
고아라는 이유로 간첩을 만들기 위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한 김영철 열사는 어느날, 조사를 마치고 유치장 안에 들어서자 마자
곧바로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머리를 벽 모서리에 박았습니다.

차라리 죽음으로 광주 시민들의 숭고한 투쟁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후유증으로 그 분은 정신질환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지난해 본 광주 MBC의 윤상원 열사 다큐에서 살아생전 김영철 열사가
바로 눈 앞에서 윤상원 열사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윤상원이 어디 있어" 하며 찾으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상무대 모형입니다.


이 장면은 당시 수용소 안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고문장면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개 저런 자세로 하루종일 있어야 했답니다.
몇시간씩 저렇게 있다보면 나중에 관절이 아파 일어서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뒤에 보이는 감옥 안의 감옥은 이른바 벌방으로
쇠창살에 수갑을 채워 놓으면 바로 서지도, 앉을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고문을 받으며 조사가 끝난 뒤, 그 분들은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에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재판을 받은 건물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광주항쟁 이후 재판을 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머릿돌에 보면 1980.8.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재판정 내 뒤에 있는 사진은 어렵게 찾아낸 당시 재판 사진이라고 합니다.
저 사진 속의 한 분이 이날 우리와 함께 계시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은 말씀하셨습니다.

광주가 잊혀지면 다시 광주는 되풀이된다고.

부디 광주를 잊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미국의 개입과 당시 발포를 명령한 자들, 여전히 행방불명인 분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3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5.18은 끝나지 않았음을 잊지 않고 해마다 이곳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 애쓰시는 분들께
진정 머리 숙여 존경과 감사를 보내며
자주통일 대행진을 위해 조선대로 향했습니다.




학살자의 후예 한나라당이 재집권한지도 벌써 4년째.
08년 광주에서 정말로 5월 영령들 앞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더랬습니다.
이제 부끄러움과 분노만이 아니라
모두 손을 잡고 하나의 마음으로
민주주의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투쟁할 때입니다.


5월은 통일로 이어집니다.
분단된 현실 속에서 빨갱이로, 폭도로 몰린 당시 광주시민들은
전두환 독재 뒤에 미국이 있음을 처절하게 깨닫고
분단때문에 더욱 날뛰는 독재의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지금도 5월을 욕되게 하는 이들은
북을 운운하며 뻔뻔스럽게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본래 이 땅의 독재는 분단의 찌꺼기에 기생합니다.
독재정권은 남북의 화해와 단합을 반대하며
기를 쓰고 대결과 긴장을 고조시킵니다.

국민들이, 분단을 극복하고 세상에 대한 시야가 바로잡히면
가장 먼저 처단될 것이 그들 자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5월에서 통일로!" "민주에서 통일로!"를 외칩니다.


마지막으로 망월동을 찾은 우리는 그날 희생된 분들을 진심으로 추모했습니다.


빤빤스럽게 학살 2년만에 광주를 찾은 전두환 이순자.
그들의 방문을 기념하려 세운 비석은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학생들이 나서 비석을 파내어
광주 망월동 묘역 입구에 박아넣었습니다.

해마다 점점 깨지고 작아지는 저 분노의 흔적은
이제 광주시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하나의 역사유적이 되었습니다.

몇년전만 해도 침도 뱉고 위에 올라가 방방 뛰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보존을 위해 밟지 말라 하더군요.



추모 제단 바로 뒤 김남석 열사의 묘가 보이십니까.

당시 행방불명이 된 김남석 열사는 계엄군에게 학살당한 목격자는 있었으나 시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방팔방으로 알아봐도 찾을 수 없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어머니는 저 곳에 가묘를 만들었습니다.
해마다 어머니는 찾지도 못한 아들의 시신을 생각하며 이 가묘 앞에서 통곡을 했습니다.

세월이 흘로 97년, 5.18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신묘역으로 이장하던 중,
뒤에 사진이 있는 무덤의 무명열사의 DNA를 검사했더니
그렇게 애타게 찾던 김남석 열사였다고 합니다.
바로 뒤에 아들이 무명열사로 묻혀 있었는데
그 앞의 가묘에서 20년을 통곡한 어머니...

하나 하나
사연없는 열사가 없습니다.
한 여성열사는 남편을 기다리다 계엄군의 유탄을 맞아
머리가 움푹 패어 돌아가셨습니다.
그 당시 그 분은 임신중이었는데
뱃 속의 아이가 30분을 발버둥치는 것을 모두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던
사연도 있었습니다.

열사 중 한 분은 유명 연예인의 작은할아버지셨습니다.
누군가
당시 광주에서 대규모 학살은 없었다, 내가 만난 광주 사람들은 당시 광주는 평온했다고 하더라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써놓았던데
내가 만난 광주 사람들 중 5.18 희생자의 가족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광주 망월동 묘역에는 광주영령 뿐 아니라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20년전, 백골단에 맞아돌아가시면서 5,6월 대투쟁의 기폭제가 된 강경대 열사를 비롯해 박승희, 노수석, 류재을 열사는 저 또한 그 싸움 속에 함께 있었기에 늘 광주에 갈 때면 눈물이 납니다.

또한 89년 당시 변사체로 발견된 이내창, 이철규 열사 또한 늘 찾아뵙는 열사입니다.
그리고..

97년, 시내에서 총까지 쏴대며 한총련 사냥을 벌이던 그 당시
아파트 13층에서 떨어지고 다시 경찰에게 짓밟혀 돌아가신
김준배 열사.

서울에서, 광주에서 한총련 집회가 있을 때면 도시락을 챙겨주던
준배형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멈추질 않습니다.

또한 한 구석에 계신 노동열사분들.

이 곳은 일신의 안락이 아니라 조국과 민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친 숭고한 분들의 삶이 새겨진 곳입니다.




광주.
아직도 우리는 그날 5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진실은 왜곡되고
민중은 죽음으로 내몰리며
정권의 오만한 폭력 앞에
민주와 통일이 죄악이 되는
그 5월의 역사 속에
아직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이 5.18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