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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아름다운 세상/노동과 영화

노예12년... 남의 이야기일까

토요일, 오전에 약속이 있어 사무실에 나온 김에 영화나 한편 볼까 하고 

눈여겨 보아두었던 "노예12년"을 예약했습니다.

자유인이었던 한 사람이 납치되어 12년동안 노예로 살았다는 솔로몬 노섭의 실화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에 

재미보다는 그저 보고 싶은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노예로서 이미 오랜 세월을 지낸 솔로몬 노섭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는 장면부터 출발합니다.


노예로 지낸 그 몇년의 시간, 

이미 그는 자유인이었던 아득한 옛날을 추억할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최근 발생한 염전노예사건이나 아프리카 노예노동 사건을 떠올리곤 합니다.


이 사건이 있었던 당시 미국은 북부지방에서 산업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자유 노동자"가 필요했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북부에서는 노예를 해방하고 

여전히 노동집약적 농장경영 위주였습니다.

그렇기에 남부에서는 흑인을 해방하자는 것이 생산과 직결된 문제였고, 결사적으로 노예해방을 반대하게 됩니다.


즉, 북부가 인도적이고 남부가 비인도적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우선 이 영화에서 솔로몬 노섭이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유인이었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예술가였고 부유한 백인들과 어울릴 만큼 사회적 신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상점에 들어가 비싼 가방을 살 때 마주친 흑인 노예를 보는 그는 피부가 검은 백인일 뿐입니다.

같은 흑인으로서 어떤 고통이나 갈등이나 동정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심지어 노예로 팔려간 곳에서도 그는 지적이고 재능있는 자였기에 다른 노예들과 다릅니다.

같이 팔려온 흑인여성이 떨어진 아이들을 생각하며 울때 짜증을 냅니다.

나도 아이들이 그립다고 말하죠.


그러나 솔로몬 노섭이 그리워하는 아이들과 

흑인 여성이 애끓는 심정으로 그리워하는 아이들은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솔로몬 노섭이 없더라도 그의 아이들은 자유인이고 요리실력이 뛰어난 어머니가 있고

도움을 받을 백인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흑인여성의 아들은 또 다른 집에 노예로 팔려갔고

딸은 매춘부가 될 것입니다.


이 둘의 아픔과 절망이 같을 수가 없고, 노섭은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자유인 솔로몬 노섭과 부인, 딸과 아들.



두번째 주인에게 팔려가고 노섭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목화밭에서 일하다 쓰러져 죽은 흑인노예를 위한 영가를 부를 때

노섭은 자신이 흑인이고 그 노예들과 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 다음부터 그에게는 다른 흑인노예들의 아픔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영화 마지막에 솔로몬 노섭의 이후 삶에 대해 간단한 설명이 나옵니다.

다시 자유인이 된 노섭은 노예상인과 노예주들을 상대로 고소를 하지만 패소합니다.

그리고 그는 흑인노예인권을 위해 강연을 다니고 "노예12년"이란 책을 냅니다.

그리고 탈출하는 노예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하다가 실종됩니다. 

자유인으로 돌아가도 그에게 12년의 경험은 흑인들과 질긴 연대의식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런지요.


▲ 개인적으로 제가 보면서 많이 울었던 장면입니다. 자유인임을 증명하고 떠나는 노섭, 그러나 뒤에 남겨지는 노예들.





다음은 노예주들의 모습입니다.


많은 분들이 지적하듯, 착한 주인과 못된 주인

둘 다 결국은 노예주였다는 것이죠.


솔로몬 노섭을 산 첫 노예주는 아이들과 떨어질 수 없어 울부짓는 흑인노예를 보고 그 딸까지 사려 하는 인간성을 보이지만 결국은 포기합니다.

농장으로 노예들을 데리고 와서 계속 우는 흑인 여성에게 동정도 표하고 "오늘은 편히 쉬고 먹을 것도 먹으라"며 위로도 보냅니다. 그러나 흑인여성이 며칠동안 내내 흐느끼자 결국은 "안되겠다"고 하고 그 여성은 어디론가 끌려갑니다. 

(아마 다른 곳에 팔렸겠죠)



▲노섭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하는 주인. 그러나 그 또한 노섭에게 결코 자유는 주지 않습니다.



▲ 노섭에게 노예신분임을 철저하게 알려주는 악덕한 주인. 



백인들은 압니다. 노섭이 자유인이었고 꽤나 지적인 사람이란 것을.

그러나 아무도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 않습니다. 

납치한 자유인을 노예로 팔고 사는 범죄행위에 대해 모두들 입을 다물고 모른척합니다. 

자상하고 자신을 아끼는 주인의 은총으로 자유인으로 돌아갈 꿈을 꾸던 노섭은 

결국 주인의 빚때문에 더 악독한 주인에게 팔려갑니다. 

착한 주인은 "너를 살리기 위한 결정이다"고 하지요.


악독한 주인 밑에서 노섭은 비로소 자신이 처해진 상황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는 더이상 지성을 갖춘 자유인, 백인들과 고급식당에서 담소를 나누는 신분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같은 처지에 놓인 주변 흑인들을 보게 됩니다. 


어설픈 위선과 동정이 오히려 현실을 부정하게 하는 반면, 

잔인한 현실은 우리에게 분노와 실천을 끌어냅니다.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백인들은 잔인합니다.

흑인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하고는 도망가면 잡아 죽일 것이란 끔직한 노래를 박자에 맞춰 신명나게 불러댑니다.

심지어 맘에 들지 않는 흑인을 괴롭히기 위해 다른 흑인들을 이용합니다.


이 잔인한 백인들 속에서 노섭은 실낱같은 희망을 주는 두 사람을 만납니다.


한 사람은 농장에서 노예들을 감독하던 사람인데 주정뱅이가 되어 흑인들과 같이 노동을 하는 백인입니다.

그 사람은 말합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감독관이 되었는데 그게 얼마나 괴로운줄 아냐,

사람에게 채찍질하고 못된 짓을 하고 나면 맨 정신으로 있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그래서 이모양 이 꼬라지가 되었다....

그 하소연을 들은 노섭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받은 전재산을 그에게 주고는 

워싱턴의 집에 편지를 보내달라고 사정합니다.



▲ 주인마님의 종이를 훔치고 과일즙을 달여 만든 잉크와 나무가지를 다듬은 펜으로 편지를 쓰는 노섭


그러나 그는 주인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치고 노섭은 한밤중에 목에 칼을 대는 주인에게 겨우겨우 변명을 하고 살아남습니다. 


아무런 희망없이 살아가고 있는 그 앞에 어느날 또다른 백인이 희망으로 나타납니다.

캐나다인으로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






그러나 노섭은 뼈저린 경험이 있기에 이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쉽게 털어놓지 않습니다.

그러다 기회를 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노섭.

노예제를 반대하는 이 백인은 쉽게 도와준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두렵다고 이야기하며 조금 망설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백인이 집으로 연락해 준 덕분에 노섭은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동정과 양심이 세상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변화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대결하는 것이기에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감독관이었던 사람은 흑인들을 학대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구조와 맞설 용기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늘 자신의 이익을 따라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노섭에게 구원의 손길을 준 캐나다인은 노예제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깟 편지한장 전해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지만

신념에 의해 그 편지를 전해줍니다.



......


이 영화는 흑인노예들의 비참함을 다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솔로몬 노섭이 쓴 "노예12년"이란 책을 보면 영화보다 더 끔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흑인노예를 다룬 수 많은 작품에서 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충분히(?) 다뤘기에 오히려 이 영화는 노예들의 또 다른 삶을 많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사실 어릴 적에 본 쿤타킨테나 톰아저씨의 오두막... 같은 작품을 보면 악마같은 남부의 노예주들이 보여주는 잔인함이 더 적나라 하지요.


그런데... 어느날 TV에서 미국의 남북전쟁을 다룬 드라마를 보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북부 공장주의 아들과 남부 농장주의 아들은 매우 친한 친구였는데 남부 농장주의 아들은 노예제도를 비난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북부 공장주의 아들인 친구네 공장에 가서 해방된 노예들의 삶을 보게 되지요.

그리고 분노합니다.

이것이 네가 말하던 자유냐! 우리 농장의 노예들도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다!

고 외칩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이 대사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남부는 나쁘고 북부는 착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게 했던 대사였고 그 이후 미국의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전쟁이 아니라 공업화된 북부와 농업위주 남부의 치열한 생존전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굳이 노예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군상을 보려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오늘 이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당시 흑인노예와 다른 자유인일까.


채찍질을 당하고 탈출하면 죽을 수도 있는 노예와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 피곤한 몸을 일으켜 "임금"을 받기 위해 출근해서 온갖 인격적 모독을 당하면서도 일해야 하는 직장인들의 삶. 아르바이트 여학생을 성폭행 한 사업주의 이야기, 아파도 억지로 출근했다가 죽은 노동자의 이야기, 일이 있어 연차를 신청했더니 해고당한 노동자의 이야기,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싸웠더니 천문학적 손배를 안겨 자살한 노동자의 이야기....


과연 우리는 자유인인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가끔 이런 하소연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나를 해고시키다니! 이렇게 비인간적일 수 있냐... 착한 노예주에게 자유를 갈구하는 노섭과 같은 것이죠...


또 우리는 가끔 훌륭한 정치인이 나타나 비참한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등 서민들의 삶을 바꿔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런 기대는 새누리당에게 은총을 구걸하거나 민주당이 우리편이 아닐까 믿곤 합니다.

그렇지만 가진자들이 가진 양심과 동정은 그만큼. 결코 사회의 구조를 바꾸지는 못하지요...


박정희도 농민들과 마주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고생하는 노동자를 보고 손을 잡아 주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전태일이 요구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은 끝까지 무시하죠.




북부에서 찾아온 백인친구에 의해 구출되는 노섭은 떠나기 전에 죽고싶을 만큼 괴로운 처지에 놓인 팻시를 꼭 안아줍니다. 노섭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습니다.

노섭이 떠나고 나면 그나마 기대어 울 사람도 사라진 팻시는 워싱턴으로 떠나는 노섭의 뒤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노섭은 자유를 찾았지만, 수많은 노예들은 여전히 그렇게 맞고, 성폭행당하고, 죽어가는 거지요...


그러나 그 비참한 삶을 잊지 않은 노섭의 투쟁은 그때부터 시작합니다. 

흔히 흑인인권운동하면 마틴루터킹 목사를 떠올리지만 저는 이런 수많은 노섭과 같은 이들의 투쟁이 만들어낸 역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흑인노예이면서 백인처럼 살고 있는 거짓된 의식을 벗어버리고 현실을 직면한다면 오늘 우리가 바로 우리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